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

백자(朝鮮白瓷)

조선 중기 동화 백자(銅畵白瓷) 합(盒)

heymryim 2020. 10. 11. 18:49

아래의 작품은 볼수록 오묘합니다. 특히 빨간색이 채색된 밑굽이 제 마음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법한데 그것을 찾지 못하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제집에 있는 도자기 자료-, 즉 경기도자박물관 백자도록 3권, 방병선 지음 '백자', 과거 백자 관련 책을 샅샅이 찾아봤는데 정확한 답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색감이 주는 아름다움은 글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일절 보정하지 않은 사진입니다.

1백여 장을 찍어 그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추려서 올린 겁니다.

설백(雪白)에 비쳐지는 옅은 푸르름이 합(盒)에서 보이니...(연초록의 다포(布) 영향도 있을 듯 싶음)

조선 전기에 잘 만들어진 백자(白瓷)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고, 그리고 후기에서도 그것을 찾을 수 있어요.

책자를 통해 접근해보면 이 작품이 나온 시기가 대략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으로 볼 수 있는데

문제는 밑굽에 빨갛게 채색된 동화(銅畵) 때문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동화백자(銅畵白瓷)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지난달에 이 합(盒)을 처음 올렸을 때 운주님이 요변(窯變)에서 생겨난 진사의 색감이라고 조언을 해주셨는데요.

1250에서 1300도의 온도를 견뎌야 색감이 좋은 설백의 백자가 나온다고 하니

제작 기법으로 볼 때 아래의 색감이 나오는 게 쉽지 않을 터... 그런데 그 답을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방병선 지음의 '백자'란 책에 200p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었어요.

"먼저 기술적인 문제인데, 청자보다 고온에서 번조하는 백자는 산화동을 환원염으로 번조하면 제대로 색을 내기가

쉽지 않다. 화학적으로 볼 때 동은 고온에서 상태가 불안정하고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특히 초벌구이 한 백자 위에 안료를 사용하여 채색하는 기법이 제대로 뿌리 내지 못한 조선 전기에는

청화나 철화보다도 휘발성이 강한 동화의 색상 표현이 가장 어려웠을 것이다.

붉은색을 내고자 했으나 검붉은색이 되는 경우도 있고,

불 조절에 실패해서 산화가 되면 초록색을 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돌베개 '백자' 中에서 발췌, 인용)

 

"불 조절 실패에서 산화가 되면 초록색을 띤다"는 글에서 비밀의 문이 열린 겁니다.

1300도 이상으로 번조하면서 동화 안료가 산화됐다, 그래서 초록빛을 띠게 된 것이에요.

사진을 통해 답을 얻게 됐습니다. 어느 쪽은 맑고 선명한 빨간색이 채색됐고, 다른 쪽은 초록빛을 띠고 있습니다.

결국 불의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두세 가지의 색으로 채색된 겁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요변(窯變)이 맞습니다.

이렇게 유물을 하나 구하면 단순히 갯수를 채우는 게 아니라 우리의 문화유산까지 덤으로 얻게 됩니다.

비용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 얻는 게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을 하게 되는 거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그럼 이 기물은 언제 나온 것일까?... 동화 안료가 본격적으로 쓰인 시기는 18세기부터!

*남아 있는 유물 중 1684년(숙종 10년)에 제작된 숭정갑자(崇禎甲子)명 동화백자묘지석이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

이런 까닭에 아래의 작품을 조심스럽게 영조대왕 때인 18세기 전반으로 본 겁니다.

물론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희망 단서를 달었는데, 그만 사기꾼 취급을 당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온갖 조롱을 당하며 "사지 마라", "사실이면 TV 뉴스에 나온다",

"애호가들에게 고미술의 잘 못된 가치관을 심어준다"는 등등의 댓글을 보기도 했습니다.

금요일 오전에 아래의 합(盒)을 얻은 후... 주말 이틀 동안 26시간 넘게 책을 보고, 또 봤습니다.

정확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 네이버와 다음, 구글을 검색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제가 찾고 싶은 답은 포털에서도 얻지 못했습니다.

'금사리 백자' 하나 얻기 위해 시간을 투자한 게 아니라

순백의 합(盒)의 밑굽에 채색된 빨간색 조선백자가 있었는지 확인해보려고요.

정확한 답을 구해야 제 숙제가 완성되기 때문에... 이 글을 쓰면서도 맞는 걸까? 수없이 반문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사실 골동품을 취급하는 분들에게 금사리 백자는 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크든 작든 18세기 전반 금사리 백자의 수가 많지 않다, 그래서 가격이 아주 고가(高價)라는 것을

우리 유물(遺物)을 좋아하는 골동 애호가인 저는 몰랐으니까요.

그리고 그 시기 밑굽에 청화를 채색하는 게 트렌드였는데, 제 것은 동화 안료로 밑굽을 채웠으니

댓글을 단 사람의 눈에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죠.

 

아무튼 글이 길어졌습니다.

높이 6.5cm, 입지름 13.5cm, 밑굽지름 7cm 크기의 백자합(白磁盒)입니다.
여느 합(盒)과는 다른 형태를 띱니다.
입술(구연부)에는 유약이 시유되지 않았습니다.
뚜껑이 닫는 부분이라 그런지 유약을 바르지 않았어요(아쉽지만 온전한 뚜겅이 없습니다. 온전했다면 좋았을 텐데...).
낯설기는 하지만 다 이유가 있어 제작됐겠지요?
물레 과정을 통해 손으로 정교하게 잘 만들었습니다. 정확한 대칭을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고요.

뭐 설백의 색감은 정말 고혹적입니다.

일본의 현대 화분 작가 평안 향산(平安香山.香翁.일본명:헤이안 코우잔)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손으로 만들 수 없는 영역까지 다루는 작가라고 해서 "면도날"이란 애칭이 붙기도 했는데요.

3백여 년 전 우리 사기장의 뛰어난 솜씨는 그 이상임을 아래의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없으니 꾸밈이 없다는 무심무작(無心無作)을 유감없이 보여준

백자 사기장(白瓷沙器匠)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요.
"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을 마음껏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