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이 떠오른다. 미술 필기시험에 종종 화가 이중섭 작품에 대한 문제가 출제됐다.
흰 소, 황소, 싸우는 소와 관련된 문제였다.
우리는 그렇게 한국인이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의 작품을, 그의 위대한 작품을 시험문제로 접근했다.
그러다 보니 따분하고, 건조한 시선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흘기듯 지나쳤는지 모른다.
사실 나도 화가 이중섭 하면 시대를 잘못 만나 짧고 굵게 살다 간 천재 화가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제주를 서너 차례 방문했으면서도 이중섭 갤러리(정확한 명칭은 이중섭 미술관)가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찾게 됐다.
사실은 이랬다. 지난 7월 4일 토요일 이른 아침에 눈을 떠서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이 있다.
날씨 앱에 들어가 한라산 기상상태를 체크한 것이다.
그런데 웬걸? 하루 전까지만 해도 날씨가 좋았는데, 당일 아침에 확인해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여름 시즌 한라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몇 주를 계획했는데... 참으로 아쉬웠다.
설레는 마음으로 제주에 왔는데, 그렇다고 호캉스를 즐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서귀포시 이중섭 거리에 있는 이중섭 미술관이었다.
호텔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인터넷으로 바로 관람 신청을 했고,
카메라 가방을 메고 갤러리로 향했다. 산행에서 출사로 바뀐 일정이었다.
관람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기에 이중섭 갤러리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흔적을 따라가던 중 화가가 잠시 기거했던 1.4평의 골방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작은 방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 살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천재화가 이중섭이 이런 남루한 공간에서 살 수 있는가?"하고 자문(自問)했다.
물욕에 눈이 어두운 내게는 이 공간이 초라해 보였지만 화가 이중섭에게는 유토피아였다.
그의 제주에서의 생활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만 고정돼 있었다.
그것을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나온 그의 그림들은 하나 같이 위대한 작품들이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행복이 묻어났다.
특히 아내에 대한 사랑이 담긴 그림 편지는 부러움을 넘어 시샘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언제나 생각하오. 나의 귀여운 남덕 군은 화공 대향에게는 안성맞춤의, 참으로 훌륭하고 멋진 아내라고,
이토록 대향에게 들어맞는 귀엽고 참된 여인을 하늘이 잘도 베풀어 주었다고.
화공 대향은 실로 귀여운 남덕을 어떤 방법으로 사랑해야만 남덕의 아름다운 마음에
대향의 애정이 가득히 넘칠는지 지금도 열심히 생각하고 있다오.
나의 품 안에 포옥 안기는 자그마하고 귀여운 단 한 사람인 나의 아내여,
안심하고 나를 믿고 기다려 주오." - 이중섭, 아내에게 쓴 편지
그는 아내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란 뜻을 담아 '이남덕'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함께 지내던 시절 그녀와 즐겨먹던 아스파라거스 통조림과 그녀의 발가락이 닮았다며,
편지의 말미엔 꼭 '발가락 군'의 안부도 살펴달라는 애교 섞인 주문도 잊지 않았다.
"건강하게 대향을 기다리며 계속 아이들의 일, 발가락 군이며, 포동포동한 손가락,
깜빡깜빡하는 당신의 다정한 애정을 말하는 눈, 보들보들한 입술, 얼마큼 살이 쪘는가,
하루에 몇 번이나 발가락을 씻고 있는지, 꼭 답장을 주기 바라오.
매번 발가락 군의 소식 써 보내 주시오. 그럼 나의 가장 멋지고 귀여운 사람이여,
당신의 모든 것을 오래오래 힘껏 껴안고 있을 테니 가만히 있어 주오.
길고 긴 입맞춤을 보냅니다." - 이중섭, 아내에게 쓴 편지
"사랑한다"는 말보다, '발가락'이라는 표현 속에 우주만큼 깊은 감정,
그리고 그리움이 스며 읽는 이의 마음에 녹아 흐른다.
짐짓 가벼워 보이나,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고작 30g 남짓의 종이 속에 사랑, 그리움, 그리고 뜨거운 생명이 담겨있었다.
이 간절한 그리움은 끝내 그의 삶을 옥죄고 앗아갔다.
불멸의 사랑을 작품으로 옮기며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화가 이중섭...
짧은 일본에서의 해후 이후 끝내 가족을 다시 보지 못했던 이중섭은 1956년 만 40세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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