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粉靑沙器) 다완(茶椀)
백자(白磁)와 더불어 조선시대 도자기의 양대 산맥으로 간주되는 분청사기(粉靑沙器)는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사를 연구한 우현 고유섭 선생이 처음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이러한 분청사기(粉靑沙器)의 매력은 단아하고 정갈한 조선백자나 푸른빛의 화려한 고려청자와는 거리가 멀고
질박함과 자유분방함을 특징으로 서민적인 풍취가 가득했습니다.
특히 정형화된 꾸밈이 적은 분청사기에 그려진 추상적인 문양의 세계는
엄격한 신분제도 아래서 사기장(沙器匠)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최소한으로 허용된 표현의 자유를 이용해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지역의 분청사기(粉靑沙器) 사기장(沙器匠)들은 그들의 생활환경에 맞게 개발하고
그들의 정서에 맞는 그릇을 성형하고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고
여기서 그들만의 공통점과 서로 다른 특징이 지역에 따라서 확연히 구분되게 됐습니다.
고려청자(高麗靑瓷)나 조선백자(朝鮮白磁)와는 달리 정치, 사회적 변화에 따라서 자생적(自生的)으로 탄생한
우리 고유의 '분청사기(粉靑沙器)'는 조선왕조 초기(15세기~16세기)에 약 200여 년에 걸쳐 제작됐으며
생산된 곳에 따라서 지역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도자기의 제작기법과 문양을 보면 생산지를 추정할 수 있고 생산지역의 명문(名文)이 있는 경우에는 더욱 명확합니다.
다양한 제작기법의 분청사기는 청자 태토(靑磁胎土:철분이 약간 섞인 청자 도자기 흙)에
물에 갠 하얀 백토(白土)의 분(粉)을 바르고 청자유약을 입히는 기법으로 청자를 모태(母胎)로 하고 있으며,
분(粉)을 바르는 방법으로 귀얄 분청과 덤벙 분청(반덤벙, 덤벙 기법)으로 나눌 수 있고,
문양을 새기는 방법으로는 상감분청(象嵌粉靑), 인화분청(印花粉靑), 박지분청(薄地粉靑), 철화분청(鐵畵粉靑),
선조문분청(線彫文粉靑) 등으로 구분됩니다.
상감분청과 인화 분청은 전국적으로 제작되었으나 인화 분청은 경상도 지역에 집중되어있고,
반덤벙분청은 전라북도, 덤벙 분청은 전라남도의 고흥 운대리, 보성 도촌리 등 해안가를 중심으로 제작됐습니다.
철화분청은 덤벙 분청 생산지역에서도 간혹 발견되지만 충청남도 계룡산 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제작됐으며,
박지분청과 선조문분청은 전라남북도에서 집중적으로 제작됐습니다.
제작기법의 분청사기를 하나둘 구입한 것이 이제 8점이 됐습니다.
보성 귀얄을 시작으로 무안 인화문, 계룡산 귀얄, 무안 덤벙, 경상북도 고령 다완(茶椀)까지
이북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의 분청사기(粉靑沙器)를 소장하게 됐습니다.
아쉬운 점은 철화분청(鐵畵粉靑)이 없다는 점인데요. 그 숫자가 많지 않아 매우 귀해 아직까지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아주 우연히 찻사발‧다완(茶椀)을 선물받아 하나둘 구입하게 돼 인연을 맺게 된 분청사기(粉靑沙器),
그리고 이 자기의 매력에 빠져 인터넷 서핑을 하며 소중한 문화유산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얕은 지식 탓에 분청사기(粉靑沙器)의 깊이 있는 세계까지 접근하지 못했으나 한 가지 어렴풋이 찾은 게 있습니다.
사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제작한 다완(茶椀))들은 처음부터 찻사발로 생각하며 만들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것이고 막걸리잔이나 무덤의 부장품이 됐을 수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최근에 들어오면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고 국내외에서 유행하던 차문화(茶文化)와 결합돼
음차(飮茶) 하기 알맞은 그릇을 찾게 되면서 찻사발로 재탄생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따지거나 계산하지 않고 언제나 늘 해오던 대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500여 년 전 무명 사기장(無名沙器匠)의 찻사발 속에는 아직도 묵묵하고 은은한 향내가 배어있습니다.
* 최근에 구입한 경상북도 고령 분청사기(粉靑沙器) 다완(茶椀)입니다. 구연부가 깨졌습니다.
11월 중순 경에 경주로 수리를 맡길 예정입니다.
찻사발 쓰임새로 사용하기 위해 은수리를 할 계획입니다(입지름 17cm, 높이 6.5cm).
* 아래의 것은 경상도 분청사기(粉靑沙器) 다완(茶碗)입니다. 상태가 아주 좋은 것인데 모 박물관에 있는 사진을 옮겨왔습니다. 참고하기 위해서요.